1. 상설전에 대해

상설전에 대해

상설전은 종합전시와 전문분야별 부문전시로 이루어지며, 오키나와의 자연・역사・문화를 ‘해양성’과 ‘도서(島嶼)성’의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해 나갑니다.

예부터 오키나와의 섬들은 바다에 의해 서로 구별 지어지고 바다에 의해 아시아 태평양지역과 깊이 연계됐습니다. 섬에는 고유의 자연이 있고 사람들의 노동이 있으며 그 하나하나가 오키나와현의 특징 있는 자연・역사・문화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섬에 숨 쉬는 풍부한 자연과 섬을 둘러싼 바다를 매개로 사람들의 노동을 소개하고 중국 당나라와 일본 야마토 시대 간에 꽃핀 류큐 왕조문화 그리고 어지러운 정권교체를 겪은 오키나와의 근대와 전쟁, 그리고 전후의 역사를 범위에 넣어 상설전의 메인 테마를 ‘바다와 섬에 살다-풍요로움, 아름다움, 평화를 추구하며’로 정했습니다.

상설전시

프롤로그 -이상향의 저편에서-

상설전에 대한 접근입니다. 발아래 산호초를 보며 오키나와에 상륙하는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1.바다로 맺어진 사람들

서클홀의 전시
‘화석의 보고(宝庫)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다양한 화석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고래나 암모나이트 등 바다에 살았던 원시 생물을 비롯해 1만 8천 년 전의 일본인 뿌리로 꼽히는 ‘미나토가와(港川)인’이나 그 무렵 살았던 류큐지카 사슴, 얌바루 흰눈썹 뜸부기 등의 화석이 무대 위에 전개됩니다.

고가치바루(古我地原) 패총(貝塚) 모형
우루마시 이시카와에서 발견된 고가치바루 패총의 발굴조사에 근거하여 조몬시대 원주민의 생활을 복원하고 있습니다. 동쪽의 바다가 보이는 대지 위에 작은 그룹을 형성하여 살았던 조몬인들의 수혈식 주거나 쓰레기장이었던 패총 등 조몬인의 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2.패총 마을에서 류큐왕국으로

구스쿠 시대가 되고 각각의 지역에 권력자가 등장하게 되자 방어를 위해 쌓은 성인 구스쿠가 다양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권력자들은 중국에 조공을 함으로 해서 문화의 이입이나 교역에 열중했으며 부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각지의 세력은 머지않아 북산(北山) 중산(中山) 남산(南山)의 세 개로 통합되었으며 과격한 항쟁을 되풀이했습니다. 이러한 세 세력을 15세기 초까지 쇼하시(尙巴志)가 통일하여 류큐왕국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때부터 약 500년의 장기간에 걸쳐 슈리(首里)를 거점으로 한 왕국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3.왕국의 번영

류큐왕국은 독자의 국가로 성립했지만 국내 권력 기반의 불안정에 따라 제1대 쇼씨에서 제2대 쇼씨에로 왕통의 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대 중국의 책봉・조공무역을 확립한 류큐는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계무역을 했습니다. 동아시아의 망망대해의 교량으로서 배를 움직이고 국제색이 풍부한 산물이 나라에 넘쳐나는 것을 칭송한 구 슈리성 정전 종에 쓰인 문장은 옛일을 기리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여기서는 동아시아 유수의 무역국가로서 번창한 후 더 공고한 국가체제를 만들었던 류큐왕국 시대를 소개합니다.

4.사쓰마(薩摩)의 류큐지배와 왕국

1609년 사쓰마 시마즈(島津)씨의 침공으로 류큐는 에도막부의 지배하에 놓였지만 중국과의 관계는 계속되었습니다. 하네지 죠슈(羽地朝秀), 사이 온(蔡温) 등 정치가의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왕국의 경영이 이루어지고 근세문화가 창조되었습니다.
또한, 이 시대에 왕실 공예품 제작의 담당 관서인 가이즈리부교소(貝摺奉行所) 등에 의해 우수한 공예품이 만들어졌으며 ‘중산세감’, ‘구양’ 등의 역사자료가 많이 씌여졌습니다.

5.왕국의 흥망

중국・일본이라는 양대국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왕국을 유지해 온 류큐였으나 19세기에 접어들어 모순이 깊어졌습니다. 농촌의 피폐와 슈리왕부의 재정난 등이 원인으로 왕국의 경영은 교착상태가 현저해졌습니다.
더욱이 아시아 진출을 노리던 구미 제국의 외압이 류큐에 몰려들어 왕국은 위기상황에 빠졌습니다.

6.오키나와의 근대

1879년 메이지정부의 류큐 처분을 받고 최종적으로 왕국은 소멸, 근대국가의 일부로서 오키나와현이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당분간 옛관습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치가 이루어져 사회의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그결과 토지정리에 따른 토지소유권의 확립이나 국정참여는 크게 지연되었으며 자본주의의 경제체제나 교육제도도 다이쇼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정리되었습니다. 한편, 일본에 의한 태평양전쟁의 진척과 함께 오키나와도 전쟁체제에 편입되었습니다.
1945년 오키나와에서는 주민을 말려들게 한 미일양군의 지상전이 전개되어 23만여의 귀중한 목숨이 사라졌습니다. 초토화된 오키나와에서는 많은 귀중한 문화재도 소실되고 파괴되었습니다.

7.전후의 오키나와

2차 대전말 오키나와 전투 때문에 큰 피해를 본 오키나와. 주민들의 생활은 원점에서 출발했습니다. 오키나와의 통치권한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고 27년간 미국의 통치에 들어갑니다.
미국 민정부는 동아시아의 전략기지로 오키나와를 중요시하는 한편 오키나와의 산업이나 복지, 교육문화를 진흥시켰습니다. 기지의 기능 강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주민의 피해도 속출했기 때문에 일본에의 복귀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1972년 오키나와의 통치권은 일본에 환원되었지만, 다수의 기지가 남겨지는 등 미해결 문제가 산적한 채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안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오키나와에서는 평화를 추구하고 ‘오키나와다움’을 활용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에필로그 오키나와의 지금 그리고 미래에

일본에 반환된 후 오키나와의 자연은 다양한 개발로 크게 모습이 바뀌었습니다. 눈부신 사회의 변화로 오키나와가 크게 바뀌던 중 2000년에는 각국의 수뇌가 이곳에 모여 규슈 오키나와 서밋을 개최했습니다. 같은 해에 ‘류큐왕국의 구스쿠 및 관련 유산군’이 세계유산에 등록되는 등 오늘날에는 오키나와 문화의 우수성이 세계에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같은 흐름에 따라 오키나와를 방문하는 관광객이나 이주해 오는 사람이 크게 증가하여 오키나와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에필로그 ‘오키나와의 현대생활’은 현민이 응모한 작품으로 구성된 이른바 ‘현대 오키나와의 생활’ 다큐멘터리 자료입니다.

부문전시

종합전시실 주위에는 자연사, 고고, 미술공예, 역사, 민속의 다섯 가지 부문전시실이 있고, 수장자료를 활용하여 종합전시나 각각의 테마를 심화하고 특화한 형태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부문전시에서는 취급하는 테마에 가변성을 갖게 하고 전시 편성의 빈도를 높이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옥외전시

박물관의 안뜰에는 옥외전시로 류큐의 전통적인 곡물 창고인 다카쿠라, 민가가 재현되어 있으며 야외실습 등의 프로그램에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접해 있는 와쿠타 가마 전시동에는 17세기경에 오키나와 도자기업의 중심을 담당한 와쿠타 가마가 발굴될 때의 모습 그대로 이설되어 있습니다. 안뜰 주위에는 식물 전시로서 원래부터 이 일대에 있던 숲을 대표하는 수목이나 유용식물을 이식・재배하고 있습니다.

교류체험실

교류체험실은 체험 전시자료인 체험용 도구를 자유롭게 사용하여 ‘만지고 보고 듣고’ 등의 오감을 통해 놀이하면서 오키나와의 ‘자연의 구조’ 또는 ‘선인들의 지혜’를 발견하고 배울 수 있는 곳입니다.
각 체험용 도구는 산호초에 사는 생물들의 공생이나 구스쿠(오키나와의 성)의 석축기술 그리고 오키나와의  언어나 민예품, 장난감 등 상설전시의 내용과 연계되어 있으며, 어린이들에게 전시의 내용에 대해 흥미를 갖게 하는 계기가 되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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